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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종일 눈이 내리던 날, 세상은 고요했고 마음은 느리게 흘렀다. 그 흰 침묵 아래에서 마주한 감정과 기억들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하루 종일 내리던 눈 아래서, 세상이 잠시 멈춘 날의 기억

    모든 소리가 사라진 거리, 눈이 만든 또 하나의 시간

    눈은 세상을 바꾼다. 단지 풍경만이 아니라, 시간의 속도와 공간의 감각까지도 달라지게 만든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던 그날, 나는 익숙한 거리에서 전혀 낯선 세계를 만났다. 모든 소리가 눈에 묻혀 사라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자동차조차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하얀 입자가 세상을 덮는 동안, 도시는 마치 숨을 죽인 듯 잠잠했다. 평소엔 분주한 출근길도, 상점의 간판도, 번화가의 네온사인도 모두 무색해졌다. 눈은 모든 걸 덮는다. 차별 없이, 소음 없이, 누구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그래서일까, 그날은 나조차도 조금은 투명해진 기분이었다. 나만의 존재감이 아니라, 그 풍경 전체에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 눈 속을 걷는다는 건 발걸음이 아닌 마음을 천천히 움직이는 일이다. 나는 그날 내내 목적 없이 걷기만 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걷는지도 몰랐지만, 발밑에 쌓여가는 눈을 보며 그저 움직였다. 주변 사람들도 같은 리듬으로 걷고 있었다. 서로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묘한 공감대가 흘렀다. 모두가 같은 장면 속의 인물이 된 것처럼. 눈은 그렇게, 낯선 사람들 사이의 거리까지도 무너뜨리는 힘이 있었다. 눈은 시간의 개념도 바꿨다. 시계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내 안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내가 서 있는 이 골목이 몇 시인지, 하루가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눈 내리는 동안은 모든 게 '지금'이었다. 그래서 더 진했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그날의 기억은 계절이 바뀐 지금도, 마치 눈처럼 내 마음속에 조용히 쌓여 있다.

    그 흰 풍경 안에서 만난 오래된 나의 마음

    눈은 외부를 덮는 동시에, 내면을 들추는 계절이다. 하얀 풍경 속을 걷다 보면, 어쩐지 오래된 감정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사람은 따뜻한 계절보다 차가운 계절에 더 쉽게 과거를 떠올린다고 했던가. 하얀 눈은 그 자체로 추억을 불러오는 도화지다. 나도 그날, 아무 의도 없이 지나가던 골목에서 아주 오래 전의 나를 만났다. 어린 시절 눈을 맞으며 뛰어놀던 기억, 첫사랑과 함께 걷던 설경 속 풍경, 혹은 아무도 없는 교실 창가에서 눈을 바라보며 혼자 울었던 밤. 눈은 단지 현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장면들을 조용히 소환해 낸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흩날리는 그 결정 하나하나가 기억의 조각처럼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나는 그날 무심코 마주한 벤치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벤치 위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아무도 앉지 않은 흔적이 더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자리에 한때 누군가 앉아 있었을 것 같았고, 그들이 남긴 체온이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눈은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느끼게 한다. 그런 눈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났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미뤄두었던 감정들, 애써 외면했던 생각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의 파편들이 그 하얀 고요 속에서 하나둘 떠올랐다. 눈은 그런 마음들을 판단하지 않고 그냥 안아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 내리는 날 유독 고요해지고, 말이 적어진다. 말보다 감정이 앞서는 날, 눈은 우리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자연의 언어다.

    멈추지 않던 마음을, 결국 눈이 멈추게 했다

    현대인은 멈추지 못한다. 해야 할 일, 쌓여 있는 알림, 채워야 할 일정표. 우리는 늘 ‘다음’을 향해 달려가며 현재를 잠시 머무는 법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날,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은 내 마음마저 멈추게 만들었다. 진정한 쉼이란 몸이 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멈추는 순간이라는 걸 그 눈 아래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처음으로 핸드폰을 꺼두고, 사진도 찍지 않은 채 그 풍경을 온전히 눈으로 담았다. 눈이 녹아 사라지듯, 지금 이 순간도 곧 지나갈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남기려 애쓰지 않고, 무엇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그냥 지금 여기, 이 흰 공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런 감정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귀하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사소한 아름다움을 놓치곤 한다. 눈은 그 사소한 것을 멈춰 서서 보게 만든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눈이라는 느린 풍경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날 이후 나는 눈을 기다리게 되었다. 예보에 눈이 온다고 하면 괜히 창밖을 자주 보게 되고, 그 흰 침묵이 다시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눈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오히려 그 불시에 우리 삶을 멈추게 해주는 고마운 계절의 선물이다. 그날, 하루 종일 내리던 눈 아래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속도를 바꿨고, 마음의 숨을 제대로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