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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오후, 한 벤치가 있었다. 그저 앉아 쉬었던 곳이었지만, 그 벤치 하나가 나의 하루를 버티게 한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하루를 버티게 한 벤치 하나가 위로가 되어주다

    1. 걷다 멈춘 자리, 벤치가 있었다

    하루라는 말이 이토록 무겁게 느껴진 날도 드물었다. 아침부터 꼬였던 일정, 예상치 못한 전화, 이어진 말실수, 억지웃음들.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어딘가 깨진 마음을 숨겨야 했고, 어깨 위엔 설명되지 않는 피로가 내려앉았다. 바쁘게 걷던 길, 눈치 없이 짙어진 햇살이 내 얼굴을 밀어내는 순간, 무작정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벤치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앉아 쉬고 싶었다. 허리도 아프고, 더는 서 있을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단순한 쉼이 아닌 ‘멈춤’의 감각이 찾아왔다. 벤치가 있었던 공원은 시끄럽지도, 그렇다고 아주 조용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멀리서 아이들이 웃고, 개가 짖고, 비둘기가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다. 그러한 일상적인 풍경이 놀랍게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낯설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앉은 벤치는 오래되어 등을 기댈 때 삐걱 소리를 냈고, 팔걸이 한쪽은 칠이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는 이 벤치를 낡았다고 말할 테지만, 그 낡음이 나에겐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오래된 것만이 줄 수 있는 신뢰감.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내 피로를 이해해주고 ‘여기 앉아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는 살아가며 자주 멈춰야 한다. 하지만 일상은 그 멈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던 길을 멈추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더더욱, 그 벤치는 소중했다. 누가 허락한 것도 아닌데, 그냥 앉아 있어도 되는 곳. 숨을 고르고, 하늘을 보고, 가끔은 울어도 되는 공간. 벤치 하나가 공간이자 시간이었고, 그 잠깐의 멈춤이 하루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2. 누구나 잠시 기대고 싶은 자리

    벤치는 도시의 가장 소박한 가구다. 하지만 그 무심한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포개져 있다.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지난날을 이야기하던 모습, 알바 면접을 앞두고 메모장을 들여다보던 청년,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던 대학생, 또는 누군가와 싸우고 눈물을 훔치던 사람. 그 모두가 잠시 멈추기 위해, 기대기 위해 벤치를 찾았을 것이다.


    그날의 나도 다르지 않았다. 딱히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었고, 벤치는 그 침묵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벤치는 듣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선 충분히 귀한 존재다.

     

    도시는 점점 빠르고 복잡해지고,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뛰고 또 달린다. 그러다 보면 벤치는 너무 당연해서, 때로는 너무 비워져 있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벤치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풍경은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마음의 쉼 없이 달려야만 했던 시간 속에서, 벤치는 '괜찮아, 잠깐 쉬어도 돼'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벤치에 앉아 있던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것을 떠올렸다. 놓친 전화 한 통, 하지 못했던 말, 오늘 하루의 허탈함.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벤치 위에서는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도, 그게 곧 정리로 이어졌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어느덧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고, 벤치에서 일어날 땐, 아주 조금 덜 피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벤치는 누군가에겐 그냥 앉는 공간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하루를 버티게 한 안식처가 된다. 그날의 나는 그 벤치 하나로 마음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3.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

    사람은 늘 강하지 않다. 하루하루를 견디다 보면, 마음 한쪽이 쉽게 찢어지고 생각은 구겨진다. ‘괜찮다’고 말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이면 결국 어느 날 무너지기 직전의 벽 앞에 서게 된다. 그날 나에겐 그 벤치가 그 벽 앞에서의 단 하나의 휴식이었다.


    그 벤치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쩌면 30분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오랜만에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고, 어떤 생각도 강요받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속도를 인정받은 느낌이었달까. 삶이란 늘 누군가와 속도를 맞춰야 하는 마라톤 같지만, 그 벤치 위에서는 잠깐 나만의 페이스를 허용받은 기분이었다.

     

    벤치에서 다시 일어날 때, 특별한 결심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가벼워졌다는 느낌,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작은 변화가 오늘의 나를 다시 만들었다. 버티기 힘든 날, 누군가의 말도, 무언가의 조언도 아닌 그저 고요한 공간이 나를 지켜줬다는 건 큰 의미였다.


    누군가는 말한다. 문제는 해결해야 하고, 감정은 다스려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제 믿는다. 때로는 해결보다 버팀이 먼저이고, 다스림보다 이해가 먼저라고. 그 벤치 하나가 그 모든 걸 가르쳐주었다. 침묵은 말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었고, 머무름은 도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벤치를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 거기 앉아 있다면, 그 사람도 어쩌면 하루를 버티는 중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벤치가 도시에, 골목에, 숲길에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결국, 잠시 쉴 곳 하나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존재니까.그 벤치 하나가 있었기에 나는 하루를 버틸 수 있었고, 그다음 날을 살아낼 힘을 조금은 가질 수 있었다. 삶이란 그런 작은 것에 기대는 순간들로, 의외로 오래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