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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커튼 하나로 나뉘던 그 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삶과 꿈, 갈등과 이해가 교차했던 작고도 깊은 기억의 무대였다.

     

    커튼 하나로 구분된 그 방의 기억, 방 안에서만 피어났던 작은 연대

     

    1. 얇은 천 한 장이 만든 두 개의 세계

    그 방은 좁았다. 콘센트도 모자라고, 바닥엔 늘 뭔가가 흘러 있었고, 밤이면 서로 뒤척이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방 한가운데 달린 커튼 한 장이었다. 단순한 커튼이었지만, 그건 경계였다. 나와 그를 나누는, 우리가 나눠야 했던 아주 조심스러운 세계의 경계였다. 하나는 나의 세계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세계였다. 커튼을 기준으로 방은 두 개의 삶으로 나뉘었고, 우리는 그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살았다. 내가 켜는 스탠드 불빛에 그가 뒤척였고, 그가 켜는 노트북 소리에 나는 자다 깼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우린 서로의 모든 생활을 공유하고 있었다. 낮에는 무관심한 듯 조용했고, 밤에는 오히려 커튼 너머의 인기척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나의 재채기, 그의 한숨, 동시에 울린 알람 소리까지, 커튼은 모든 걸 가르지는 못했다. 때로는 그 천이 너무 얇게 느껴졌고, 또 어떤 날엔 그 안쪽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커튼은 공간을 나누었지만, 삶을 완전히 나눌 순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이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고, 서로 다른 꿈을 품고 있었다. 그 꿈은 종종 부딪혔다. 나는 새벽에 공부를 했고, 그는 늦은 밤까지 영화를 보았다. 나는 조용히 살고 싶었고, 그는 친구를 자주 데려왔다. 우리는 싸우지 않았지만, 그 커튼에는 많은 감정들이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튼 너머의 존재는 위로이기도 했다. 어두운 밤, 낯선 공포에 잠 못 들 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작은 타자 소리는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친구도, 가족도 아니었지만, 그 방에서만큼은 서로의 일상 일부였다.

    2. 방 안에서만 피어났던 작은 연대

    그 방에서의 삶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공유된 것이었다. 씻는 시간, 식사 시간, 전기세 정산부터 가끔 마주 앉아 먹던 컵라면까지. 커튼 너머로 넘긴 컵라면 한 개는 때론 큰 위로가 되었고, 머리 아프냐며 건네던 해열제 하나에 묘한 유대감이 생겼다. 처음엔 서로를 모르는 타인이었지만, 오래 머물수록 작은 배려들이 생겨났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그는 스피커 대신 이어폰을 썼다. 그가 시험 기간일 때, 나는 알람을 무음으로 맞췄다. 그렇게 방 안엔 말 없는 협의가 쌓여갔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정전이 된 적이 있다. 방 전체가 어두워지고, 무심코 켜던 불빛 하나 없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 그가 조용히 커튼을 걷고 말했다. “초콜릿 먹을래요?” 그 순간, 커튼은 벽이 아니라 다리였다. 서로를 마주 본 것은 처음이었고, 어색한 웃음 뒤에 묘한 친근함이 피어났다. 그러나 커튼은 다시 닫혔고,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는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커튼 너머에서 “잘 자요”라는 인사가 오갔고, 같은 드라마를 같이 보기도 했으며, 벽에 부딪힌 내 손전등 불빛이 그의 천장에 그려낼 무늬를 함께 바라보기도 했다. 누군가와 공간을 나눈다는 것은, 예상보다 더 깊은 감정의 흐름을 낳는다. 이해와 오해, 짜증과 위로, 말없는 연대까지. 그 좁은 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고, 그 커튼은 점점 ‘경계’보단 ‘연결’의 의미로 다가왔다.

    3. 이별과 함께 남은 것, 사라진 것

    시간은 흐르고, 결국 우리는 그 방을 떠났다. 짐을 싸는 날, 커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마지막까지 한 번도 철거하지 않았던 그 천은, 어쩌면 우리가 만든 규칙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나는 내 짐을 싸며 그의 짐이 줄어드는 걸 지켜봤고, 그는 내 빈 매트리스를 보며 말했다. “이 방... 좀 허전하네요.”그 말 한마디에, 수많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처음 그 커튼을 달았던 날, 내가 전선을 정리하느라 낑낑댔던 모습, 그가 책상에 앉아 몰래 울던 밤. 그 방은 작은 세계였고, 그 커튼은 그 세계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주소도, 연락처도 따로 묻지 않았다. 그건 우정이라기보다는 ‘같은 시간’을 공유한 동료에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나는 어느 공간에서든 커튼을 보면 그 방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의 한숨, 웃음소리, 물을 따르던 소리, 모두가 하나의 배경음악처럼 기억 속에 흘러들었다. 지금은 서로의 삶에 아무 역할도 하지 않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가장 가까웠던 존재는 바로 커튼 너머의 ‘그’ 또는 ‘나’였다. 그런 기억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들 누군가의 커튼 너머에 머물렀고,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으며, 때로는 그 작은 경계 안에서 평생을 기억할 어떤 순간들을 겪는다. 커튼은 치워졌지만, 그 안에 살았던 감정들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