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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풍경, 그 안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밀려왔다. 아무 말도 없던 하루, 눈물로 기억된 그 순간을 기록해 본다.
1. 말없이 바라보던 창밖, 마음이 먼저 흘러내렸다
그날은 평범한 여행 중 하루였다. 특별한 일정도, 거창한 계획도 없이 그냥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을 다녀오는 버스를 탔다. 비가 조금씩 내리던 오후, 창밖은 흐릿했고, 버스 안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느라 바쁘게 탑승하고 하차했고, 나는 말없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음악도 꺼두고, 책도 펴지 않은 채.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뜨거운 감정이 목울대까지 차올랐다. 이유 없는 울컥함.
창밖으로는 평범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논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도로,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할머니, 마을 앞 정류장에 멈춰 선 낡은 버스 정류장. 하나하나 특별한 장면은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가슴 깊숙한 곳을 두드렸다.
창밖 풍경은 그저 ‘풍경’이 아니었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외할머니 댁에서 봤던 마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시절의 골목, 학교 끝나고 들르던 문방구… 마음속 어딘가에 고이 숨겨놓았던 장면들이 겹쳐지며 창문을 스크린 삼아 흐르기 시작했다. 눈으로 본 건 현재의 풍경이었지만, 내 가슴은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됐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더 깊었던 감정. 창밖 풍경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내 마음이 흘러나가는 하나의 창구였던 것이다.
2. 무언가를 잃고 있다는 감각, 그 자리에서 마주한 나
시간은 계속 흘렀고, 버스는 또 다른 마을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감정이 한 번 터지고 나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눈물이 멈추고 나서야 나는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고요히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단, 아련함이었고, 그리움이라기보단 잃어가는 무언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무심히 흘려보낸다. 어릴 적 풍경, 스친 인연, 잠시 머문 장소들. 그것들이 내게 남긴 감정은 사라진 줄 알았지만, 사실은 마음의 깊은 서랍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창밖 풍경은 그 서랍을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나는 한참 동안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스마트폰도, 지도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직 바깥을 바라보는 행위 하나로. 그것은 마치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나, 조용히 숨을 고르는 느낌이었다. 소음 없는 세상, 멈춘 듯한 감정,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 그러한 조합은 나를 ‘존재’ 그 자체로 이끌었다.
버스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나는 처음으로 그 침묵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누구도 내 울음을 묻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 조용한 공간 안에서 나는 나를 마주할 수 있었고, 잊고 있던 감정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였다. ‘그립다’, ‘고맙다’, ‘조금 외롭다’, ‘괜찮다’.
눈물은 단지 감정의 결과물이 아니라, 기억을 복원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눈물은 어떤 아픔의 표현이 아니라, 오래된 나와 다시 만나는 다리였다. 그리고 그 다리는 창밖 풍경이 조용히 놓아준 선물이었다.
3. 한 장의 풍경이 하루를, 아니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하차했다. 도착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 여정 속에서 나는 도착해야 할 감정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앉았던 벤치에 그대로 앉아,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날의 바람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고, 나는 다시금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창밖 풍경이 내게 보여준 것은 단지 바깥세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기억, 잊고 있었던 감정, 혹은 나조차 몰랐던 내 모습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내겐 인생의 전환점처럼 다가온다는 것. 그 사실이 묘하게 뭉클했다.
사람들은 보통 특별한 장소, 특별한 만남에서 감동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날 나는 깨달았다. 가장 평범한 장면도, 마음의 문이 열릴 때 그 자체로 인생의 문장이 된다는 것을. 버스 창밖의 풍경, 그것은 누군가의 일상이었고, 나에겐 여행 중의 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장면은 내가 내 감정을 돌아보게 한 하나의 거울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카메라도 꺼내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특별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풍경은 내 마음 안에 정확하게 남아 있다. 흐릿한 빗물 너머로 보이던 마을, 그 속의 사람들, 그리고 울고 있던 나 자신.
어떤 하루는 말보다 눈물이 더 정확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그 하루는, 창밖 풍경 하나로 시작되었다. 아주 작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감정의 시작점. 그날 이후로 나는 어떤 장면 앞에서든 잠시 멈춰 바라보게 되었다. 혹시 또 다른 눈물의 이유가, 그 장면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