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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서도 잊힌 작은 마을, 그 가로등 하나 아래에서 나는 멈춰 선 시간을 마주했다. 빛이 아닌 기억을 밝히는, 조용한 밤의 이야기.

     

     

    잊혀진 마을의 가로등 아래 다시 걷고 싶은 밤

    1. 불 꺼진 마을 끝자락, 우연히 마주한 가로등

    그날은 단지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시골길은 내비게이션에서도 더 이상 안내를 하지 않았고, 이정표조차 오래전에 녹이 슬어 글자가 희미해져 있었다. 도시의 번쩍이는 간판에 익숙해진 눈은 어둠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도로 끝, 누군가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졌을 것 같은 마을 어귀에서 나는 하나의 빛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래된 가로등 하나였다.

     

    가로등 아래는 작은 원처럼 밝았다. 그 주변을 둘러보니, 낡은 우체통, 벽돌이 삐걱거리는 폐가, 그리고 어릴 적 봤던 흑백 드라마 속 골목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가로등이 켜져 있다는 건, 누군가는 여전히 이 마을에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이 마을을 떠난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마지막 마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어둠은 짙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조용한 정적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로등의 빛은 강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오래된 감정을 마주했다. 잊힌 장소의 조용한 품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에서, 나는 내 과거의 어딘가를 더듬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 앞마당, 겨울밤 눈 오는 길, 혹은 첫사랑과 손을 맞잡고 걸었던 낡은 골목… 모든 것이 이 가로등 하나 아래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원하지만, 때론 낡고 멈춘 것들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잊힌 마을의 가로등 하나, 그건 단지 빛이 아니라 과거를 밝히는 등불이었고, 나를 이곳으로 이끈 어떤 운명이자 따뜻한 초대장이었다.

    2.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시간의 결

    가로등 아래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왜 이 마을은 잊혔을까? 왜 이 불빛만 남아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질문은 내 안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잊힌 것은 이 마을이 아니라, 내가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살았고, 웃고, 울었을 그 골목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조용해졌다.

     

    어느 집 담장 너머로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줄기가 갈라지고 이끼가 낀 나무였지만, 잎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아마도 이 나무는 수십 년간 이 마을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대화, 아이들의 웃음, 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줄어드는 발자국 소리까지. 나무는 기억하고 있었고, 가로등은 그 기억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길모퉁이 작은 슈퍼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창문에 붙은 전단지는 해바라기처럼 색이 바래 있었고, 그 위에 쓰인 글자는 ‘다음 주부터 휴업합니다’였다. 그다음 주가 몇 년 전이었을까. 사람의 부재는 소리보다 조용하게 공간을 지운다. 하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 잔디 틈 사이로 자라난 민들레, 벽돌 사이로 흐른 빗물 자국, 그리고 가로등 아래 생긴 그림자 하나. 이 마을은 아무도 없지만, 아직 살아있었다.

     

    도시에서는 흔적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이 들어선다. 하지만 이 마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라지는 대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다시 와주기를.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나 같은 길 잃은 여행자라도, 이곳을 걷기를. 그 기다림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어느새 차분해지고, 내 삶의 속도마저 잠시 멈춘다.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3. 가로등 아래의 그림자, 다시 걷고 싶은 밤

    해가 완전히 지고, 가로등의 빛만이 마을을 지탱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나뭇가지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밤이었다. 나는 가로등 아래 선 채, 세상이 숨을 멈춘 듯한 고요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뜻밖에도 따뜻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확인이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의미를 찾기보단 결과를 서둘렀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단 한 걸음조차 허투루 내딛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었고, 그 정지 속에서만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다. 빛 아래 생긴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웃었다. 그 그림자가 나에게 말했다. "너, 아직 여기에 있어."

    마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로등 아래 엽서를 하나 썼다. 누가 볼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오는 누군가가 그것을 보게 되길 바랐다. "이 마을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내 마음도 함께 묻었다.

     

    차로 돌아가는 길, 가로등은 그대로였다. 점점 멀어질수록 그 빛은 작아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더 선명하게 새겨졌다.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든 다시 걷고 싶은 밤으로 남았다. 가끔 도시의 불빛 아래서 갑자기 그 가로등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눈부신 스마트폰 불빛과 광고판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잊힌 마을의 조용한 불빛을 그리워한다. 언젠가 다시 길을 잃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마을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가로등 하나 아래에서 조용히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