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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예상에도, 지도에도 없던 작은 마을에서의 하루. 우연히 닿은 그곳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나는 비로소 '머무는 여행'을 배웠다.
1. 길을 잃고 닿은 마을, 예고 없는 인연의 시작
여행의 아침은 언제나 분주하다. 전날 밤까지 계획한 일정표를 확인하고, 기차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다음 목적지의 맛집까지 체크한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전통시장과 지역 박물관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도로 공사로 버스가 우회했고, 지도 앱은 끊임없이 재탐색을 반복했다. 결국 하차한 곳은 원래 계획에 없던, 이름조차 낯선 작은 마을이었다.
처음엔 당황했다.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고, 주변엔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에서 한참 뒤처진 듯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이 이상하게도 나를 붙잡았다. 그냥 돌아가기엔 뭔가 아쉬웠다. 그래서 마음을 접고 그 마을을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몇 걸음만 옮겨도 마을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벽화로 가득한 골목, 햇볕 아래에서 고추를 말리는 집 앞마당, 고양이가 느긋하게 낮잠 자는 버스 정류장. 모든 것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 마을엔 ‘볼거리’ 대신 ‘머물거리’가 있었다. 지나가는 노부부가 인사를 건넸고, 한 할머니는 덥다고 얼음물 한 컵을 내어주셨다. 내가 외지인임을 알아차린 듯, “요즘은 여기 잘 안 와. 지나치기 쉬운 동네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이 마을은 잊혀 있었지만, 그 덕분에 진짜 ‘여유’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정해진 일정표엔 없었지만, 이 예고 없던 인연이야말로 진짜 여행이 주는 선물 같았다. 처음엔 우연이었지만, 점점 이 마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2. 하루를 천천히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
그 마을에서의 시간은 도심과 전혀 다른 속도로 흘렀다. 시계는 계속 움직였지만, 마을은 그보다 더 느릿한 호흡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작은 시냇가 옆 벤치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있었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었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도시에서는 늘 무언가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충만하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메뉴는 단출했지만, 직접 담근 김치와 된장찌개는 엄마 손맛 같았다. 식당 주인은 내게 어디서 왔느냐 물으며 수줍게 웃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는 없었고, 대신 진심 어린 환대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맞은편에서 방앗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옮겨 구경하니, 방앗간 주인은 떡 하나를 손에 쥐여주며 “이건 그냥 맛만 봐”라고 하셨다. 말 그대로, 그냥 주고 싶어서 준 것이다.
그날 오후는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서 보냈다. 주민들이 기증한 책들로 가득한 서가 사이,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밖에서는 바람이 분다. 안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머무는 여행’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관광지에서 찍는 인증숏보다, 이렇게 천천히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훨씬 가치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머물러 있기에 보이는 것들, 천천히 흘러야 만져지는 마음의 속도. 일정표에 없던 이 마을이 내 여행의 진짜 주인공이 되기 시작했다.
3. 돌아서며 남겨진 풍경, 다시 가고 싶은 이유
해가 기울 무렵, 나는 마을 초입에 앉아 하루를 되돌아봤다. 처음 도착했을 땐 당황스러움뿐이었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하루를 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채워졌다. 정해진 시간, 유명한 장소, 남들의 평가에 기대지 않고도 이렇게 깊이 기억에 남는 하루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 따뜻한 손길, 구수한 음식 냄새, 오후의 고요한 햇살… 모두 다 ‘일정표’ 밖에 있었지만, 진짜 여행을 만들었던 조각들이다. 여행의 정수는 어쩌면 그런 우연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준비되지 않은 여정, 이름 없는 골목, 예고 없이 건네는 인사에서 오는 감동. 나는 그날의 경험을 여행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일정을 잊었을 때, 진짜 하루가 시작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분주한 일상에 다시 몸을 담그면서도 그 마을의 기억은 종종 내 안에 살아난다. 엘리베이터 안, 붐비는 지하철 속, 혹은 커피숍 창가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고요하고 따뜻한 풍경들. 그곳은 지리적 장소를 넘어, 내 마음속 쉼터가 되었다. 언젠가 다시 그 마을을 찾아가고 싶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벤치에 앉아, 그날의 바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우리는 모두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가장 멋진 여정이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일정표에 없던 그 하루가 내게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