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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멈춘 듯했던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 인생에서 가장 고요했던 그 찰나를 기억하며, 마음이 쉬어갔던 길을 따라간다.

1.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날의 오후
늘 해야 할 일은 넘쳤고, 시간은 모래처럼 흘러만 갔다. 어떤 날은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체크리스트를 떠올렸고, 또 어떤 날은 버스 안에서 이미 하루를 포기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쫓기듯 살아가던 중, 우연히 주어진 ‘비어 있는 하루’가 있었다. 특별한 약속도, 해야 할 일도 없던 어느 봄날 오후. 괜히 뭘 해야 할 것 같아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문득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있어 보자.’
그날 나는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귀에 이어폰도 꽂지 않았고, 스마트폰도 꺼두었다. 눈앞엔 흐드러진 벚꽃과 산책하는 노부부, 그리고 나무 위로 걸리는 햇살이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무기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음속에서 천천히 이완이 시작됐다. 할 일의 목록이 사라지고,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 벤치에 앉아 있던 두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고요했던 시간이었다.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가 있는 하루’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났을 때, 오히려 내가 가장 온전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을 지나며 비로소 알게 된 건, 고요함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허락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을 가장 깊이 돌본 날이었다.
2.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 밤, 내면이 울리는 순간
사람들은 흔히 고요함을 자연 속에서 찾으려 한다. 산속 오두막이나 파도 소리 들리는 해변처럼. 하지만 내가 고요함을 마주했던 곳은 다름 아닌, 서울 한복판의 낡은 고시원 방이었다. 수험생 시절,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공부에 지쳐 책을 덮고 창밖을 봤다. 그날따라 빗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고, 옆방의 소음도 멈춰 있었다. 유일하게 켜진 작은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나는 처음으로 ‘조용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 고요는 외롭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정감과 위안이 가득 찬 공간이었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내 안의 불안한 목소리가 멈춘 것이었다. ‘너는 잘하고 있는 게 맞냐’는 자책도, ‘이래선 안 된다’는 강박도 그 순간엔 입을 닫았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그마한 숨결 같은 감정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충분해’라고.
그 밤은 공부를 쉬었다는 이유로 불안해하지 않았던, 유일한 밤이었다.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느낌, 그것이 얼마나 큰 평화를 주는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우리는 흔히 소음의 부재를 고요라 부르지만, 진짜 고요는 마음의 긴장이 풀리는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찾아오면, 세상의 모든 불빛과 소리도 잠시 멈춘 듯 느껴진다. 내게 그 밤이 그랬다. 빗소리와 함께 머물렀던 내면의 정적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서 은은하게 울린다.
3. 익숙한 일상 속, 잠시 멈춰 선 순간의 온기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느닷없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건 아주 사소한 풍경 덕분이었다. 퇴근길, 늘 걷던 거리에서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 날이었다. 그날따라 노을이 유난히 붉고 깊었다. 아스팔트 위로 길게 드리운 해 질 녘 빛과, 정류장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 길목에서 잠시 멈춰 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대신, 그냥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그 몇 분간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간의 압박도, 내일의 걱정도 잠시 내려놓은 채, 그저 빛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내 옆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들 속에서 멈춰 있는 한 점이었다. 하지만 그 점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소란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중심 같았다. 뭔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한 순간,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완전한 기분. 그런 기분은 바쁘게 달려온 하루 속에 숨겨진 작은 선물이었다.
그때 느꼈다. 고요함은 꼭 특별한 장소나 상황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잠시 고개를 들면, 그 안에 숨어 있는 고요가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부드럽게 내려앉는 저녁노을 같았다. 눈에 띄지 않지만, 마음을 포근히 덮어주는 감정.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 하루 속에도 고요가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이후의 수많은 일상에도 작은 평화를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