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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삶의 소란 속에서도 고요는 문득 찾아온다. 가장 조용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며, 마음이 잠잠해진 순간들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1. 모두가 떠난 새벽, 텅 빈 공원 벤치에서 마주한 나 자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요함을 ‘소리 없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고요함은 그 이상의 감각이다. 그것은 온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 혹은 모든 외부 자극이 차단되고 오직 내 안의 소리만이 또렷해지는 순간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요했던 시간 중 하나는, 한겨울 새벽,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있던 때였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잦아들고, 나뭇가지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정적의 아침이었다. 전날까지 쌓였던 고민과 인간관계에서의 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때였다. 그냥 걸어야 할 것 같아서 무작정 나왔고, 그 길 끝에서 마주한 건 텅 빈 벤치와 무채색의 세상이었다. 앉는 순간, 추위보다 강하게 다가온 건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나를 움직이지 않는 침묵의 감각이었다. 그 고요는 외로움이 아니라, 나를 다시 붙잡아주는 포근한 감정이었다. 처음엔 머릿속이 복잡했다. 스스로에 대한 원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 반복되는 선택의 후회. 하지만 벤치에 앉아 그 고요함과 마주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치 공원 전체가 나의 감정을 받아주는 듯했고, 나무는 묵묵히 나를 바라봐주고, 하늘은 아무 판단도 없이 나를 덮어주는 듯했다. 고요 속에서 나는 나를 미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고, 그 자리에서야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어.”그날 이후, 나는 종종 그 벤치를 떠올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 세상의 소음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내가 나와 마주했던 그 장소. 인생은 끊임없는 움직임의 연속이지만, 진짜 변화는 멈추었을 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멈춤의 시간은 언제나 고요함에서 시작된다.
2. 병실 창가의 오후, 시간도 숨을 쉬는 듯했던 순간
인생에서 고요는 종종 슬픔과 함께 온다. 하지만 그 슬픔은 꼭 어둡거나 아픈 것만은 아니다. 내가 두 번째로 경험한 진정한 고요는, 병실 창가에서였다. 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셨고, 나는 그분 곁을 지키기 위해 매일 병실에 머물렀다. 그날도 평소처럼 무심한 의료기기 소리, 복도 끝 간호사들의 발소리, 다른 병실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속에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오후,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지셨고, 창밖에는 겨울 햇살이 조용히 쏟아졌다. 그 순간, 병실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의료기기조차 작동을 멈춘 듯 느껴졌고, 나 또한 모든 감각이 정지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조차 그 공간에서 숨을 쉬는 듯했다.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어떤 커다란 진실 앞에 선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때 나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하늘, 천천히 흔들리는 나뭇가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한 줄기 빛. 아무것도 극적이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아버지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고,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기적인지 깨달았다.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후회는 고요 앞에서 힘을 잃었다.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모든 감정이 정리되었고, 내 마음속의 무게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런 종류의 고요함은 의도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득 다가오고, 마음을 꿰뚫고, 말없이 감정을 정리한다. 그날 병실의 창가에서 느꼈던 고요는 지금도 내 삶의 기준점으로 남아 있다. 흔들릴 때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무엇이 소중한지를 다시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 파도 소리도 멈춘 새벽의 바닷가, 홀로 선 발끝에서의 깨달음
여행 중에도 우리는 수많은 소음과 마주한다. 관광지의 북적거림, 숙소 주변의 음악, 이동하는 교통수단의 진동. 하지만 내가 어느 겨울 혼자 떠난 바닷가에서 맞이한 새벽은, 어떤 도시의 고요보다 더 깊고, 더 묵직한 침묵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나는 해가 뜨기 전 바닷가로 향했다.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며 모래사장을 걷다가 멈춰 선 그 순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침묵과 마주했다. 놀랍게도, 파도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바다는 분명히 출렁이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청각이 일시적으로 멈췄나 싶을 정도로, 그곳은 조용했다. 새벽 공기는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불분명했으며, 나는 그 경계에 혼자 서 있었다. 그때 느낀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내가 세상과 분리된 듯한 감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고요가 너무 낯설고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이 볼을 스치고, 발밑에 물이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사이, 나는 처음으로 삶이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순간’들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잠시 멈춰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비로소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거창한 사건에서 찾으려 하지만, 진짜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다가온다. 바닷가의 고요는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소음 속에 나를 흩트리지 않게 되었다. 삶이 복잡할수록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았고, 마음이 흔들릴수록 그 새벽의 바다를 떠올렸다. 인생에서 가장 고요했던 시간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들려준 말은, 지금까지도 내 삶을 붙잡아주는 단단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