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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삶은 늘 시끄럽지만, 문득 찾아온 고요의 순간은 더 깊게 남는다. 가장 고요했던 그 시간을 되짚으며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인생에서 가장 고요했던 시간, 그 침묵의 무게를 기억하며

    1. 도시의 소음을 등지고 맞이한 새벽, 첫 고요의 기억

    고요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가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이 차단되고, 내 안의 울림이 더 선명하게 들리는 상태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 진짜 고요함을 느낀 순간은, 아주 평범한 새벽이었다. 대학 입시를 마치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해방감 속에서, 갑자기 잠이 깨 버린 새벽 4시. 복잡한 도심 한복판, 방 한 칸짜리 자취방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라곤 냉장고의 윙윙거림과 간헐적인 거리 청소차의 굴러가는 바퀴 소리뿐이었다. 그조차도 어느 순간 멈춰버리고, 나 혼자 세상에 남겨진 듯한 정적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당시 나는 불확실한 미래와 막연한 기대 사이를 오가며 불안정한 정체성의 틀 안에서 흔들리던 때였다. 수많은 질문들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그 새벽만큼은 생각이 멈췄다. 아무도 나를 호출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스마트폰의 알림도, TV 소리도, 인간관계도 모두 일시 정지된 세계 속에서 나는 내 숨소리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세상이 비로소 나에게 휴식을 허락한 듯한 감정을 느꼈다. 고요는 때로 우리가 피하려는 감정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날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스스로와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단순한 새벽의 정적이 아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정적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새벽,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고 내면의 목소리가 다시 깨어나는 그 시간은, 지금까지도 ‘가장 고요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2. 이별의 병실에서 흐른 고요, 가장 뜨거운 침묵

    고요함은 언제나 평온하기만 한 감정은 아니다. 어떤 고요함은 너무도 깊어서,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통증처럼 남기도 한다. 내가 경험한 두 번째 고요는, 어머니의 병실에서였다. 말기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말수가 현저히 줄었다. 고통 속에서도 늘 가족들을 챙기던 그분은, 이제 눈빛으로만 대화하셨고, 우리는 말보다는 손을 잡는 것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참 아이러니하다. 생명이 회복되기도 하고,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우리 가족은 정적 속에 갇혀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입원 날, 병실에는 어떤 기계 소리도 없었다. 산소 호흡기조차 떼어진 상태였고, 간호사들의 발소리도 사라진 새벽.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수백 마디의 말이 넘나들었다. “고마웠어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같은 말들이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가슴 깊은 곳에서만 맴돌았다. 그날의 고요는 말보다 깊었고, 울음보다 무거웠다. 병실의 정적은 단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는 말할 수 없어서, 더는 듣지 못해서 존재하던 고요함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감정이 있고,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는 눈빛이 있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화려한 언어보다 ‘함께한 시간’이 더 진실되다는 사실을. 어머니의 손이 천천히 식어가던 그 순간, 나는 아무 소리도 없는 병실에서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날 이후, 고요는 나에게 슬픔이자 위로, 끝이자 시작의 의미로 남게 되었다.

    3. 아무도 없는 바닷가,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순간

    세 번째 고요는 외로움과 자유가 뒤섞인 순간이었다. 20대 후반, 나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는 여행을 결심했다. 취업과 인간관계에 지쳐버린 나를 데리고, 나는 충동적으로 겨울 바닷가로 향했다. 여름의 활기찬 해변과는 전혀 다른 풍경. 인적이 드문 백사장, 차가운 바람, 무채색 하늘 아래 나는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밤이 깊어지고,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모닥불을 켜지도 않았고, 음악도 듣지 않았다. 파도 소리는 어쩐지 너무 멀리 있었고, 텐트 속은 세상의 마지막 방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는 진짜 ‘소리 없음’을 처음 경험했다. 자연이 숨을 죽인 듯했고,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진 듯한 느낌. 휴대폰 신호도 닿지 않는 곳에서, 나는 오로지 ‘존재’만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거기서 나는 삶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역할과 기대, 성과와 책임은 모두 모래 위에 남겨두고, 텐트 속에서는 그저 나 자신으로만 존재했다. 고요는 그 순간, 나를 치유하는 힘이 되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멈춘다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선택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어딘가로 가야 하며,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고요는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죄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고요함을 단지 조용한 상태가 아닌 ‘내가 나로 돌아오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