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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옥상은 좁고 평범한 공간이겠지만, 어느날 밤에는 우주의 한가운데처럼 느껴졌다. 공간속 별과 바람, 그리고 고요한 나만의 은하를 담은 그 기억을 꺼내본다.
1. 빌딩 숲 위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도시의 하루는 끝없이 이어지는 소리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 자동차 경적, 광고 전광판의 깜빡임까지.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이 공간에서 때때로 나는 내 목소리를 잃은 느낌을 받곤 했다. 말이 들려도 의미 없이 흘러가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조차 무의미하게 겹쳐지는 피로감 속에서, 나는 도망치듯 옥상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끝, 철제문을 밀고 나가면 나만의 조용한 세계가 펼쳐졌다. 그 좁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가장 넓은 우주였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도시의 소음은 뒷배경처럼 멀게 들렸고, 머리 위로는 생각보다 더 많고 선명한 별들이 떠 있었다. 나는 이 빌딩 숲 위에서, 오히려 가장 '혼자'일 수 있었고, 그래서 가장 '나'일 수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족 속에서도 종종 숨겨야 했던 내 감정들—불안, 외로움, 기대, 희망—이 옥상 위에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말없이 별을 바라보다 보면, 그 모든 감정이 우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고, 나는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 시간은 마치 누군가가 ‘정지’ 버튼을 눌러준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은 흐르지만, 동시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라는 사실이 외로움이 아닌 자유로 다가오는 곳. 그곳에서 나는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됐고, 어떤 모습이든 받아주는 공간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 들던 날들 속에서, 옥상은 나를 놓아주고도 품어주는 유일한 장소였다. 나만의 우주 한복판, 그 작고 위대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2. 별빛은 울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신 울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빌딩 사이로 보이는 그 좁은 하늘조차도 그 순간엔 끝없이 넓어 보였다. 도시의 불빛이 가려놓은 별들도, 고개를 오래 들고 바라보면 서서히 드러났다. 작고 희미한 별들이 하나둘 등장하는 그 장면은 언제나 벅찼다. 어떤 날은 별이 반짝이지 않아도 위로가 되었고, 어떤 날은 한 점 빛없는 구름 낀 하늘조차도 위안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하늘 아래에서, 나는 그저 ‘존재하는 나’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조용히 울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묻지 않는 공간. 감정이 가득 찼을 때 누군가의 위로보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별빛은 내 슬픔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또 그렇기에 부담 없이 울 수 있었다. 위로하지 않으니 더 깊이 닿고, 반짝이지 않으니 더 진솔해졌다. 감정을 꾸며낼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울어도 되는 밤이, 옥상에서만 가능했다.
그때 느낀 것은 ‘고독’이 아닌 ‘고요함’이었다. 도시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될 때 찾아오지만, 옥상에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움이 있었다. 그 평화 속에서, 내 슬픔은 부끄럽지 않았다. 별들은 내 울음에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 무심함이 오히려 치유가 되었다. 눈물을 닦고 다시 계단을 내려올 때쯤이면, 나는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울음을 넘긴 자리엔 새로운 숨이 깃들었고, 나는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3.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법을 배운 밤들
옥상은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 세계였다. 그곳에 오르면 모든 규칙이 느슨해졌고, 어제의 실수나 내일의 걱정이 잠시 멈춰졌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익숙한 소음과 익숙한 삶으로 되돌아갔다. 옥상은 탈출구였지만, 동시에 내가 다시 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해 준 연습장이었다. 혼자 울고, 웃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나는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세상은 변하지 않아도, 나의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불안할 땐 하늘을 보라는 것. 감정은 누르고 삼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결코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혼자 있지 마’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혼자는 회복이었다. 그 혼자의 시간을 통해 나는 다시 ‘같이’의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옥상에서 바라본 세상은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나는 아주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본 별빛은 이제 내가 사람들 속에서 힘들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 밤, 그 공기, 그 고요’는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서 나를 지키고 있다. 다시 내려올 용기를 주었던 그 옥상, 그 우주 한가운데 같은 공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이제는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