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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 길목 어딘가에 늘 자리하고 있는 나무 한 그루는 내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일종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장치였다.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그 나무는 내가 바쁘게 지나치는 시간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계절에 따라 잎이 돋고 떨어지며, 날씨에 따라 고요하거나 흔들리며,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그 나무는 내 일상과 감정에 작지만 꾸준한 흔들림을 남겼다. 나무 한 그루를 매일 마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관계이며, 그 관계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의 반복이 아니라, 삶의 리듬에 맞춰 형성된 정서적 연결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나무가 내게 주었던 정서적 울림과, 일상 속 존재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1. 아침의 시작, 그 자리에 늘 있던 나무
내가 매일 지나치던 길목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처음엔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느 날 문득 비 오는 아침 그 나무 아래에서 잠시 우산을 펼치던 순간부터 그 나무는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이후로는 매일 아침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려 확인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그 나무는 매번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비가 오면 젖었고, 바람이 불면 흔들렸으며, 봄이면 새순이 돋고 가을이면 노란 잎이 흩날렸다. 나무는 늘 거기 있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은 매번 달랐다. 그렇게 나무는 내 하루의 기준점이 되었고, 내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고요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로 기억되었다. 우리는 흔히 큰 사건이나 특별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지만, 때로는 그저 매일의 반복 속에서 우리 곁을 지키는 존재들이 더 큰 울림을 준다.
2. 계절의 흐름을 먼저 알려준 존재
도시에 살다 보면 계절의 흐름을 체감하기 어렵다. 실내에서는 늘 비슷한 온도가 유지되고, 화면 속 날씨 앱이 정보를 대신한다. 그러나 내가 매일 마주하던 그 나무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생생하게 계절의 변화를 알렸다. 3월의 어느 날, 가지 끝에 연한 녹색의 작은 싹이 돋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설렘, 여름 한복판에 잎이 무성하게 뻗어 그늘을 만들어주는 고마움, 가을 햇살에 반짝이며 흩날리던 노란 잎의 아름다움, 그리고 겨울엔 잎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로 바람을 버텨내는 고요함. 그 나무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내가 계절을 잊고 살아갈 때마다, 그 나무는 아무런 말 없이 '지금이 어떤 시간인지'를 알려주는 살아 있는 달력이자 시계였다. 나무를 통해 나는 자연이 들려주는 시간을 배웠고, 내 삶 또한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3. 침묵 속 위로, 말하지 않는 관계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지만, 때때로 어떤 관계는 말 없는 존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나무는 내게 말을 걸지도, 반응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나무로부터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무기력했던 날, 상처받은 날, 너무 기쁜 날에도 나는 자연스레 그 나무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 나무는 보여줬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한 감정을 품은 채 그 앞을 지나며 나는 마음속으로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인간관계처럼 오해도, 갈등도 없고, 기대도 책임도 없는 관계였기에 오히려 더 깊이 스며들었다. 존재로서만 위로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침묵의 관계’다. 나무는 늘 말없이 거기 있었고, 나는 그 곁을 지나며 스스로 회복되는 경험을 했다.
4. 일상의 배경에서 의미의 중심으로
우리는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똑같은 풍경이 늘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그 나무도 처음엔 내 일상의 배경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 나무가 풍경이 아닌 주인공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복되는 출근길의 피로 속에서, 삶의 의욕이 식어가던 어느 순간 그 나무가 갑자기 유난히 크게 보였던 날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나무가 단지 길가의 식물이 아니라, 내 일상의 감정과 시간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하나의 거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정이 요동칠 때에도, 생활에 변화가 찾아올 때에도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바빠 잊어버린 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배경이었던 존재가 어느 순간 삶의 기준점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의미가 되는 순간'이며, 나무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존재였다.
5. 존재의 가치, 그리고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
나무를 바라보며 가장 많이 떠오른 감정은 ‘존재의 의미’였다. 수많은 사람이 매일 그 길을 지나지만, 그 나무를 의식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존재하고 있지만 인식되지 않는 시간, 그 무게를 감내하고 있는 나무를 보며 나는 ‘나도 언젠가 이렇게 잊히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존재의 가치란 누군가의 인식 속에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걸까? 나무는 그런 질문에 말없이 대답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무가 잘려나가 자리에 없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예상보다 큰 허전함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그 나무가 내 삶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다. 존재는 사라진 후에야 종종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6. 결론: 나무를 기억하며, 나를 돌아보다
매일 마주하던 나무 한 그루는 내게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존재였다. 그 나무를 통해 나는 계절을 느꼈고, 침묵의 위로를 받았으며,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 삶 속에는 때로 너무 가까워서 그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가족, 친구, 반복되는 일상, 거리의 풍경들처럼, 나무도 그렇게 ‘무심한 친밀함’ 속에 머물렀던 존재였다. 그러나 일상이 흔들릴 때, 정서가 예민해질 때, 그들은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으로 남는다. 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내 삶의 거울이 되었듯, 오늘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존재들 역시 누군가의 기억에 깊이 스며드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나무를 기억하는 이 순간, 나는 다시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일 아침에도 누군가에게 그런 나무 한 그루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한 존재로 살아가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