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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 없이 흐르던 시간의 나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곳에서의 하루는 숫자보다 리듬에 가까웠고, 삶은 훨씬 더 느리게 빛났다.

     

    시계가 필요 없던 나라에서 느리게 빛나는 삶

     

    1. 시간표 대신 태양과 바람으로 사는 사람들

    처음 그 나라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마트폰 시계를 습관처럼 열어보다가 문득 멈춰 섰다. 공항의 벽시계조차 멈춰 있었고, 숙소 직원은 “지금 몇 시인가요?”라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아침은 지나간 것 같아요.”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곧 깨달았다. 이곳은 시계가 필요 없는 나라였다.


    남태평양의 한 섬나라. 이곳 사람들은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했다. 점심은 배가 고파질 때쯤 먹었고, 약속은 “내일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쯤”으로 잡았다. 정확한 시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기분’과 ‘주변 사람들과의 흐름’이었다.


    이런 생활 방식은 처음엔 불편했다. 정시에 맞춰 움직이는 도시에 익숙한 내게 ‘시간이 흐름에 맡겨지는 삶’은 낯설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해가 창을 비추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고, 시장에서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이 들리면 산책을 나섰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리듬이었다. 새들이 노래를 부르면 아침이었고,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오르면 정오였으며, 바닷바람이 선선해지면 저녁이었다. 마을의 시간은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살아 움직였고, 그 흐름에 몸을 실으면 마음속 시계도 점점 느려졌다.

     

    시계 없는 삶은 여유와 연결되어 있었다. 누구도 늦었다고 재촉하지 않았고, 일정이 조금 미뤄지는 건 일상이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집중했다. 친구와의 대화가 길어지면 약속 시간이 바뀌었고, 누군가 늦게 도착하면 “오히려 잘 왔다”며 환영했다. 시간은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조율되었고, 그 조율은 정해진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온도’로 이루어졌다.


    시계가 없는 나라에서 나는 처음으로 시간을 ‘측정’이 아닌 ‘느낌’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내가 놓치고 살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늘 부족하다고만 느꼈던 내게, 그곳은 '시간은 충분하다'는 감각을 선물해 주었다.

    2. 분 단위로 쪼개지지 않는 하루의 밀도

    시계가 없던 나라에서 가장 큰 변화는 하루가 더 길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측정하지 않자 시간이 늘어났다. 도시에서의 하루는 알람 소리에 시작되어 회의, 일정, 약속으로 분 단위로 쪼개지고, 그 조각들 사이를 급하게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의 하루는 시작과 끝만 있었고, 그 사이의 흐름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하루의 밀도가 달랐다. 나는 아침마다 바닷가를 걸었고, 해안가 마을의 노점에서 구운 바나나를 사 먹었다. 해가 떠오를 무렵의 햇살이 얼마나 따뜻하고, 파도가 들려주는 소리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시계를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점심 무렵, 현지 주민과 함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은 사라지고 오직 ‘지금’만이 남았다.

    시간을 잊은 자리에 집중력이 생겼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알람을 확인하지 않았고, 글을 쓰다가도 몇 시인지 몰랐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펼쳐졌고,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 인생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시계가 없는 삶은 ‘해야 할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도시에서는 시간을 이기는 사람이 성공자처럼 여겨진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정밀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이 능력의 척도다. 그러나 시계 없는 이곳에서는 그 반대였다.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 더 신뢰받았고, 시간을 오래 들인 일이 더 존중받았다. 사람들은 빠르기를 자랑하지 않았고, 대신 ‘얼마나 잘 쉬었는가’를 이야기 주제로 삼았다. 하루를 쪼개 쓰는 삶이 아닌, 하루 전체를 한 편의 이야기처럼 사는 방식. 그것이 시계 없는 삶의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내 시간관을 바꾸어놓았다. 나는 이제 일부러 약속을 ‘느슨하게’ 잡는다. 분 단위의 타이머 대신, 대화를 충분히 나누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시간은 쪼개는 것이 아니라 흐르게 하는 것이라는 그 나라의 철학이, 내 삶의 깊이를 되찾아주고 있다.

    3. 시계를 다시 차며 기억한 것들

    여행이 끝나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손목에 시계를 다시 찼다.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고, 게이트를 확인하며, 분 단위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 손목이 무거워졌다. 시계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삶의 무게가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 돌아오자마자 일정이 가득한 캘린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알람은 다시 내 하루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배운 한 가지를 기억하고자 했다. 시계는 시간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나라에서의 기억은 내 안에 오래 남았다. 지금도 바쁜 일상 속에서 문득 시계를 보며 “지금이 꼭 무언가를 해야 할 시간이 맞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간을 잊고 보낸 날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시계를 보되, 시계에 휘둘리지 않으려 한다. 가끔은 시간을 정하지 않고 친구를 만나고, 때로는 알람을 끄고 느지막이 일어난다. 빠르게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도 한 번쯤은 ‘시계가 필요 없던 나라’를 떠올리며, 그곳의 리듬을 흉내 내보는 것이다.
    삶은 단지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 안에 머무는 감정, 관계, 호흡이 있어야 진짜 살아있는 하루다. 시계를 차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시계를 벗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시계 없는 나라에서 나는 시간을 잊고 나를 만났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시계를 찬 나는, 이제 시간을 달리 살아가려 한다. 숫자가 아닌 리듬으로, 분이 아닌 순간으로. 그것이 그 나라가 내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