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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류장에서 충동처럼 올라탄 버스, 목적지도 없이 떠났던 하루가 내게 가져다준 뜻밖의 평온과 풍경을 기록해 봅니다.

     

    무작정 탔던 그 버스, 낯선 곳에서 시작된 작고 깊은 하루

    출발은 아무것도 아닌 감정이었다

    그날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흔하게 있을 법한 날이었다. 알람보다 먼저 깬 아침, 무의미하게 열어본 스마트폰 뉴스들, 지루하게 반복되는 대화창. 갑자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햇빛조차 내 기분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나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도 없이 집을 나섰다. 무작정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버스 정류장은 늘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날 나는 그 흐름 속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목적지도 없었고, 그저 첫 번째로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 노선표를 확인하지도 않고, 손잡이를 잡은 채 창문 밖으로만 시선을 던졌다. 익숙한 거리들이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고, 버스는 점점 낯선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디든 좋아’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출발은 꼭 큰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유도 목적도 없이 떠나는 것도, 어쩌면 그 자체로 완성된 움직임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늘 의미를 찾아 헤매며 살아왔지만,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음’이라는 방식으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이 이 여행의 가장 조용한 혁명이었다. 버스 안에서 듣는 타인의 대화, 창밖으로 흘러가는 가로수들, 신호등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들이 모두 나를 위한 배경처럼 느껴졌다. 목적지가 없었기에, 나는 매 정류장에서 잠시 멈춰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괜찮다’는 마음은, 처음으로 내 삶의 핸들을 스스로에게 맡긴 감각을 선물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이었다.

    내려서 만난 낯섦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을 때, 안내방송이 아닌 정적이 나를 깨웠다. 운전기사가 한 번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보는 거리, 처음 보는 간판, 낯선 골목이 펼쳐졌다. 흔히 말하는 여행지도,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동네의 공기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 공기는, 오랜만에 마시는 가을 아침처럼 맑고 낯설게 기분 좋았다. 한적한 시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채소를 진열하는 손길, 사과를 골라 담는 노부부, 아침 햇살을 등지고 앉은 노인의 어깨까지. 그 모든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심히 따라 걷다가 시장 끝에 있던 작은 국밥집에 들어갔다. 메뉴는 단 하나, 돼지국밥이었다. 뜨거운 국물에 손을 녹이며 숟가락을 들고 있자니, 이 낯선 공간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안에는 사람의 체온과 같은 익숙한 온기가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는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고맙게도 조용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무심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하천이 나왔다. 정비가 잘된 산책로도, 일부러 꾸민 듯한 조경도 아니었지만, 풀 냄새와 물 흐르는 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디서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정적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 정적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품었다. 나는 그 하천 옆 벤치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문득 ‘이런 하루도 존재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배웠다. 일정이 없는 하루, 낯선 곳에서의 식사,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외롭지 않고 오히려 따뜻할 수 있다는 사실. 낯섦은 종종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 낯섦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쓰다듬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내가 찾은 것들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사뭇 달랐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길을 달리지만, 풍경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여정을 마치고 되돌아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떠날 땐 목적이 없었지만, 돌아올 땐 마음속에 여러 개의 작은 기억들을 안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아무 계획도 없이 떠났기에 가능했던 선물들이었다. 그날 하루는 누구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냥 버스 한 번 탔다 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무작정의 하루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용기를 확인했고, 낯선 공간에서 나 자신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분명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형식적인 틀을 벗어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진짜 여행 같았다. 무작정 탔던 버스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줬고, 나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얻었다. 그것은 어떤 장소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비워낸 상태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풍경도, 사람도, 공기도 모두 같은 장소였겠지만, 그날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전보다 깊게 바라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문에 기대어 나는 다짐했다. 다시 그런 하루를 가져야겠다고. 꼭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고, 꼭 의미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좋다고. 때로는 목적 없는 움직임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방식의 여정일 수 있으니. 무작정의 가치, 낯선 풍경의 위로, 침묵 속의 대화. 그 모든 것을 기억하며, 나는 다시 일상 속으로 조용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