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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적 없이 걷는 산책이 어떻게 삶의 방향을 비추고, 무의미해 보이는 길 위에 의미를 남기는지를 돌아보는 에세이입니다.

     

     

    목적 없는 산책속에서 잊고 있던 시간과 마주친 날

     

     

    1. 방향 없는 발걸음이 가리킨 진짜 나의 자리

    언제부턴가 산책이란 단어에 ‘건강’이나 ‘계획’이 따라붙었다. 만보기를 채우기 위해, 운동량을 확보하기 위해 걷는 사람들. 나도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핸드폰도 두고 나왔고, 시계도 보지 않았다. 어디를 향할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그냥 걷기로 했다. 나의 발걸음은 처음으로 지도도 목적지도 없이 떠돌았고, 그 안에서 나는 오히려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심 한복판, 아스팔트를 밟으며 시작된 산책은 어느덧 주택가 골목을 지나고, 작고 오래된 상점을 지나는 길로 이어졌다. 방향이 없으니 어떤 경로든 내 길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목적 없이 걷는 길에서는 주변 풍경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담벼락 위 고양이, 벤치에 홀로 앉은 노인, 조용한 골목에 흐르던 음악 한 조각까지. 모든 것이 내 시선에 붙잡혔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정해지지 않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목표와 계획을 따라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종종 자신을 잃는다. 목적 없는 산책은 그런 나를 되찾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말하겠지만, 오히려 의미를 강요하지 않았기에 모든 순간이 진짜가 되었다. 목표가 없으니 비교도 없고, 평가도 없다. 나는 단지 길을 걷고 있고, 그 자체로 충분했다. 산책을 마칠 즈음, 나는 이전과 똑같은 곳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풍경을 담고 있었다. 방향이 없는 산책이 알려준 건, 도착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이라는 단순하고 깊은 진리였다. 결국 나를 어디로 이끄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기에, 그 길 위에 내가 남았기에.

    2. 낯선 골목, 잊고 있던 시간과 마주치다

    걷다 보니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낯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내가 일부러 찾아올 이유도, 누군가에게 소개할 만한 명소도 아니었다. 오래된 벽화, 닫힌 철문, 풀린 페인트와 비뚤어진 우편함.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골목에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고, 나는 그 흔적을 따라 걸으며 나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골목길이 떠올랐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뛰놀고, 비가 오면 웅덩이에 물장구치던 기억. 지금 걷고 있는 이 낯선 길은 그런 기억을 자극했다. 벽돌 담장에 기대어 잠시 쉬며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골목은 조용했지만 내 안에서는 많은 소리가 들렸다. 걱정, 후회, 그리움. 그리고 작은 위로. 목적 없이 걷는 길에서는 시선이 바깥보다 안쪽을 향한다.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낯선 길은 그래서 낯선 감정까지 끌어올린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신체 활동이 아니라, 기억의 여행이고 감정의 정리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감정들이 판단이나 해석 없이 흘러간다는 점이다. "괜찮아, 그냥 그렇게 지나간 거야."라고 말해주는 듯한 감각. 길 끝에서 만난 작은 마을서점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들어가 책 한 권을 고르고 싶었지만, 이번엔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은 소비나 선택보다 ‘존재’에 집중하는 날이니까. 그 골목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의 목적지일 필요 없이, 머물렀던 그 시간이 가치 있었노라고.

    3. 돌아오는 길, 어제와 다른 풍경을 품은 거리

    어느새 해가 기울고 거리가 붉게 물들었다. 아까 지나온 길로 돌아가는 중인데도, 풍경은 다르게 느껴졌다. 같은 건물, 같은 간판, 같은 나무였지만 내가 그 위에 덧입힌 감정과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목적 없는 산책은 그렇게 일상의 틀을 비틀고, 반복되는 공간에 새로운 온도를 입혀준다.돌아오는 길목에서 커피숍 앞을 지나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자 괜히 마음이 놓였다. 이 도시가 아직 따뜻하다는 증거 같았고, 나 또한 그 따뜻함 속의 한 조각이 된 듯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웃음 하나도, 길가에 떨어진 꽃잎 하나도 이전과는 다르게 읽혔다. 걷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우리는 매일 같은 길을 걷는다. 출근길, 하굣길, 장보러 가는 길.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무뎌지고, 생략된 풍경 속에서 점점 더 둔해진다. 하지만 오늘처럼 목적 없이 걷는 하루가 끼어들면, 그 익숙한 길이 낯설어지고, 낯섦 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살아난다. 삶은 늘 똑같지만, 시선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걷는 시간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날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단지 한 바퀴를 돈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공간을 한 바퀴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목적 없는 산책은 결국 내면을 순례하는 여정이었고, 그 길 위에 쌓인 감정과 사유는 고스란히 나의 일부가 되어 돌아왔다. 길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변해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