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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도시의 늦은 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는 연습일지도 모른다. 그 고요한 모험의 기록.

     

    모르는 도시에서 늦은 밤 걷기, 새벽 공기의 맛, 그리고 돌아오는 길

    1. 길을 잃어도 좋은 밤, 낯섦이 주는 해방감

    늦은 밤, 여행지의 도시 골목은 낮과 전혀 다른 표정을 갖는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가게 간판은 모두 꺼져 있으며, 오직 가로등 불빛 아래서만 풍경이 살아 숨 쉰다. 그 속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의외로 두려움이 아니라 묘한 해방감이다.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이 도시에서, 나는 그저 ‘걷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모르는 도시에서의 야간 산책은, 어찌 보면 일상 속에서 갇혀 있던 규칙과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출근도 없고, 약속도 없고, 말조차 섞을 일이 없는 이곳에서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헤드폰을 끼지 않아도 고요함이 배경음악이 되고, 지나치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마저 낯선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들린다. 길을 잃는 것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목적 없는 걸음은 계획 없이도 풍경을 선물하고, 정해지지 않은 방향이 새로운 거리와 마주하게 한다. 가끔은 구글 지도조차 닫아버리고,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만 걷는다. 그 순간의 자유는 낮의 여행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익숙한 도시에서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만, 낯선 도시의 밤에는 그저 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마주치는 것은 타인도 아니고 풍경도 아닌, 다름 아닌 ‘혼자 있는 나’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와도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 그것이 바로 이 산책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위로이자 해방이다.

    2. 가로등 불빛 아래의 작은 관찰자

    늦은 밤, 도시는 말수가 적어진다. 복잡했던 교차로도 잠잠하고, 상점의 간판들도 조용히 불을 끈다. 하지만 그런 정적 속에서도 나는 많은 것을 본다. 새벽까지 불이 켜진 창문 하나, 음식물 봉투를 꺼내며 하품을 하는 주민,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가게 주인의 뒷모습. 밤의 도시는 낮보다 훨씬 더 사람의 숨소리를 가까이 들려준다. 낮에는 관광객으로 분주히 걷던 거리에서, 나는 이제 관찰자가 된다. 말없이 걷고, 멈춰 서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행위가 마치 의식처럼 느껴진다. 벤치에 앉아 뒷골목 벽화의 빛바랜 색을 바라보거나, 닫힌 문 뒤로 새어 나오는 음악을 듣는 일도 이 밤의 산책에선 특별한 사건이다.
    불빛은 어둠 속의 세부를 드러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간판의 낡은 철제 가장자리, 골목 벽에 붙어 있던 오래된 전단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가는 속도까지. 이 모든 것이 마치 연출된 무대처럼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도시의 작은 무대를 유일한 관객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밀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날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때로는 두려움을, 그러나 더 자주 자유로움을 안겨준다. 늦은 밤, 나를 알아보는 이 하나 없는 그 거리에서 나는 더욱 솔직해지고,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세심해진다. 누군가의 삶을 몰래 스쳐 지나가며, 조용히 안녕을 속삭이는 시간. 그것이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3. 새벽 공기의 맛, 그리고 돌아오는 길

    모르는 도시에서의 밤 산책은 종종 새벽까지 이어지곤 한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 걷다 보면, 어쩌다 해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공기에는 낮과 전혀 다른 감촉이 스며든다. 선선하고 맑으며, 어딘가 다짐처럼 맑은 냄새가 느껴진다. 그때쯤이면 나의 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진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채우는 방법을 새로이 배운다. 아무 의미 없이 걸었던 그 시간이, 되돌아보면 너무도 깊은 위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길, 처음엔 낯설던 풍경이 이제는 조금 익숙하게 느껴진다. 지나쳤던 편의점 간판, 담장 위 고양이, 비스듬히 기운 가로등조차도 반갑다. 그것은 어쩌면 이 도시가 나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잠깐 스쳐가는 존재지만, 이 밤의 공기를 들이마신 자만이 알 수 있는 온기다. 숙소에 돌아와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눕는 순간, 나는 오늘이 단지 ‘관광지의 하루’가 아니었음을 안다. 그것은 한 도시와 나눈 아주 사적인 대화였고,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내면의 시간이었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도,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스스로를 위로해 줄 산책. 모르는 도시에서의 늦은 밤 걷기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이 아니라, 외로움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자신에게 조금 더 다정해진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