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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고 망가진 신발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그 멈춤이 뜻밖의 길을 열었다. 우연 속에 숨어 있던 숨겨진 신전, 그 조용한 발견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망가진 신발이 이끈 숨겨진 신전, 길을 잃은 후에야 도착한 목적지

     

    1. 고장 난 신발끈, 우연의 문을 열다

    여행에서 계획은 중요하다. 시간표, 경로, 체크리스트까지 철저히 짜 놓는 것이 익숙한 나였다. 하지만 그날, 모든 준비를 무력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신발끈 하나였다. 아침부터 이상하게 끊어질 듯 불안하던 운동화 끈이 결국 낯선 골목 한복판에서 완전히 풀려버렸다. 아무도 없는 시골 마을의 작은 길목, 휴대폰은 터지지 않고 근처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짜증 섞인 숨을 내쉬며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여행 일정은 꼬였고, 시간은 흘러갔다. 하지만 바로 그 멈춤이 모든 것을 바꿨다.

     

    잠시 벗어놓은 신발을 고쳐 묶고 있던 그때, 등 뒤로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작은 숲길이 보였다. 아무 표시도 없이 풀만 무성하게 자란, 지도엔 나와 있지 않은 길. 만약 신발이 멀쩡했다면 절대 멈추지 않았을 자리. 하지만 어쩐지 그 순간, 나는 가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발 끈을 대충 묶은 채로, 나는 그 숲길로 들어섰다. 거기엔 어떤 설명도 안내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함이 오히려 나를 끌어당겼다.

     

    신발은 여전히 불편했고, 걷는 것도 녹록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흙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머리 위로 스쳐가는 햇살.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기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때로는 계획되지 않은 고장이 우리를 새로운 문으로 이끈다. 신발끈이 풀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그 숲길의 입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멈춤은 곧 방향의 전환이었다.

    2. 풀숲 너머, 시간에 묻혀 있던 신전을 마주하다

    길은 생각보다 깊었다. 처음엔 단순히 산책로 같은 느낌이었지만, 점점 더 숲은 조밀해졌고, 사람의 발길이 드문 듯 보였다. 바닥엔 낙엽이 두껍게 깔려 있었고, 나무 사이로 길은 좁아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겁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걷기를 삼십 분쯤, 나무들이 갑자기 열리며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눈앞엔 작은 석조 건물이 있었다. 높지는 않았지만, 형태는 고대 유적처럼 단단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기둥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파여 있었고, 잡초는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런 안내판도 없었고,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익명성이 이곳을 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이곳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숨겨 놓은 듯한 장소였고, 찾을 수 있으려면 계획이 아닌 우연이 필요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신전 안에는 작은 돌제단이 놓여 있었고, 주변엔 누군가 놓고 간 흔적처럼 보이는 꽃과 향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이곳을 알고 찾아온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조용한 증거였다. 나는 그 앞에 가만히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곳이 내게 신전인 이유는 건물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생각이 고요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나는 말 없이 자신과 마주했고, 그 침묵이 깊은 울림이 되었다.

     

    계획된 관광지의 화려함이나 설명이 넘치는 명소가 아니었지만, 이곳은 내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장소가 되었다. 숨겨진 신전은 단지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일상과 생각의 틈 사이에 존재해 있었던 것 같다. 망가진 신발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이 고요한 공간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3. 진짜 목적지는, 길을 잃은 후에야 도착한다

    그 신전을 나올 때, 나는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이번엔 느슨하게 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 길은 이제부터가 진짜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종종 일상의 작은 고장을 불편함으로만 여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같은 일상 속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삶에서 진짜 목적지는, 때로 길을 잃거나 멈췄을 때 찾아온다. 망가진 신발이 준 기회처럼 말이다.

     

    신발은 결국 새로 사야 했고, 여행 일정은 하루 밀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았다. 그 하루는 잃은 날이 아니라 얻은 날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이끌었고, 그 이끌림 속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중심으로 여행을 계획하지만, 진짜 기억에 남는 건 그런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들이다. 우연히 길을 잃고, 뜻밖의 장소를 만나고, 전혀 예기치 않은 감정을 마주했던 그 시간들.

     

    나는 이제 가끔씩 길을 일부러 돌아가 보곤 한다. 정해진 경로보다 느리고, 때로는 더 피곤하지만, 그 안에 놓인 우연과 발견을 믿기 때문이다. 망가진 신발은 단지 내 발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을 다시 열어준 열쇠였다. 숨겨진 신전은 어쩌면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다만 그곳에 가기 위해선, 계획에서 벗어날 용기와 멈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어쩌면 작고 사소한 고장 하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