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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전해졌던 그 마음. 언어를 넘은 공감과 진심이 만들어낸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먼저였던 기억을 되짚어 본다.
1. 낯선 땅, 낯선 이에게서 느낀 익숙한 온기
우리는 종종 언어가 다르면 이해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말이 안 통하면 마음도 닫히고, 결국 벽만 남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쩐지 진짜 따뜻했던 순간들은, 오히려 말보다 마음이 앞섰던 기억들이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건 몇 해 전, 배낭 하나 들고 유럽을 홀로 여행하던 때였다.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길을 잃었고, 인터넷도 끊기고, 주변엔 영어가 통하는 사람도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지도를 들고 서 있던 나에게 다가온 건 할머니 한 분이었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더니, 내 손에 있던 지도를 넘겨받았다.
그분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못 하셨다. 나 역시 체코어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무언가 통하고 있었다. 손짓과 표정, 그리고 작은 웃음들로 우리는 길을 설명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할머니는 집까지 데려다주시겠다는 듯 내 앞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나는 따라갔다. 말은 한마디도 없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길은 낯선 도시에서의 가장 따뜻한 산책길이었다.
집 앞에서 이별할 때, 나는 어설픈 체코어로 “데쿠이(고맙습니다)”를 외쳤다. 할머니는 눈을 찡긋하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하루는 내게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남겼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낯선 사람을 향해 먼저 손 내밀 용기를 준다. 언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건네질 수 있는 건, 진심이 담긴 마음이다. 그날, 나는 언어보다 깊은 온기를 배웠다.
2.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피어난 우정
한 대학 프로젝트로 국내에 거주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팀 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나에겐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고, 상대방 역시 한국어가 서툴렀다. 첫날엔 어색함이 가득했다. 우리는 단순한 소개만 하고도 침묵에 빠졌고, 주제 회의는 번역 앱에 의지한 채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그 어색한 시간을 견디며, 우리는 조금씩 다른 방식의 소통을 익혀 나갔다. 언어가 아닌 행동, 반응, 표정, 그리고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공감들로 말이다.
어느 날 밤, 우리 팀은 프로젝트와 관련된 작업을 위해 다 같이 모여 밤늦게까지 일했다. 피곤한 가운데 웃음이 나오는 일이 생겼다. 한 친구가 마시고 있던 커피를 실수로 쏟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우스워 다 같이 웃음이 터졌다. 언어 없이 터진 웃음은, 말보다 빠르게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웃음은 서로 다른 언어를 초월한 가장 진실한 감정의 발산이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서로를 믿고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작업이 끝난 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팀원들과는 여전히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언어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번역기에 의존하기도 하고, 종종 오해도 생긴다. 하지만 그 관계는 지속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의 벽을 함께 넘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부족했던 시간은 오히려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이제 단지 언어가 아닌 마음의 감각으로 서로를 기억한다. 손짓 하나로 피어난 우정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3. 말보다 진심이 먼저 도착하는 순간들
언어는 명확하고 강력한 도구지만, 때로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은 벽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아무 말없이도 느껴지는 따뜻함은 우리를 울게 한다. 그 감정은 병실에서도, 공항에서도, 심지어는 이별의 순간에서도 찾아온다. 내가 잊지 못하는 순간은 할머니의 임종 직전의 기억이다. 할머니는 말을 잃으셨고, 그저 눈만 깜빡이셨다. 말이 통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 할머니의 마음은 분명히 느껴졌다. 손을 꼭 잡은 채로 전해지던 미세한 떨림, 그 안에는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이 다 들어 있었다.
말없이 전해지는 마음은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을 만든다. 누군가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거나,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 혹은 짧게 건네는 따뜻한 음료 한 잔. 이 모든 건 언어보다 빠르게 마음을 도착시킨다.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진다’는 믿음이 있고, 그것은 사람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연결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빠르게 말하고 판단하는 시대에, 말 없이 전하는 마음은 오히려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정작 마음은 멀어진 경우도 많다. 그럴 땐 오히려 입을 다물고, 눈을 맞추고,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통했던 마음은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천천히 피어나고 있다. 진심은 언어보다 깊고,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진심은 결국 우리를 다시 연결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