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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거리에서, 낯선 언어 속에서 내 이름을 들었다. 서툰 억양 속에서도 마음이 움직인 이유를 따라가 본다.
발음은 낯설어도, 마음은 정확히 닿았다
여행지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은 특별한 날도 아니었고,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다. 그냥 골목 어귀의 작은 카페에서 주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서툰 발음으로, 하지만 정성스럽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바리스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것은 낯선 나라의 언어였지만, 나를 정확히 가리키는 소리였다. 다른 나라에서 이름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익숙한 한국어의 억양과 다르게, 어딘가 어색하게 뒤틀린 발음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나를 향한 시선이 담겨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이름이라는 것이, 그곳에서는 하나의 외국어가 되고, 낯선 존재가 된다. 하지만 바로 그 어색함이 나를 더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 짧은 순간만큼은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발음은 서툴렀지만, 그 안에는 배려와 관심이 있었다. 단지 주문한 음료를 전달하기 위한 호출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정확히 불러보려 애쓴 흔적, 알파벳 하나하나를 입안에서 굴려보며 익히려 한 노력, 그 모든 것이 짧은 순간에 묻어 있었다. 어쩌면 한국에선 수없이 듣고도 무심했던 내 이름이, 낯선 타인의 입에서 들릴 때 이렇게 특별해질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이름을 더 사랑하게 됐다. 그것은 단지 나를 부르는 단어가 아니라, 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다른 언어 속의 내 이름, 그건 내가 낯선 곳에서도 누군가의 기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명이었다.
이름이 언어를 건너면, 나는 잠시 다른 사람이 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다른 언어로 불러줄 때,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다. 익숙한 일상의 나와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입은 듯한 감각. 마치 배우가 무대 위에서 다른 인물을 연기하듯, 나는 그 순간 잠시 그들의 세계에 들어간다. 발음이 조금 어긋나도, 억양이 다소 엇나가도, 그 안엔 새로운 나의 모습이 숨어 있다. 한국에서의 이름은 나의 배경, 가족, 학교, 사회적 위치까지 불러오는 무게감을 동반한다. 반면 외국에서 불린 이름은 그 모든 배경을 지운 채, ‘그 순간의 나’만을 반영한다. 과거의 이력이나 평판과는 무관한 상태에서 오직 그 자리의 나로 존재하는 느낌. 어쩌면 그 낯섦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 “누구의 딸”도, “어디의 직장인”도 아닌 그냥 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된다. 이국의 공간에서는 이름조차 어색한 악센트로 부르기 마련이다. 나는 때때로 내 이름을 그들의 발음대로 수정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면 더 쉽게 기억되고, 더 빠르게 소통된다. 그때마다 나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유연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에 따라 계속해서 변주되는 것. 그리고 그런 이름을 통해 나도 계속해서 변해간다. 이름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타인과 연결시키는 매개다. 그 이름이 다른 언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 나는 내 삶의 또 다른 단면을 발견한다. 익숙한 이름이 낯선 땅에서 울릴 때, 나는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라, 그 사회 속의 하나의 목소리로 존재한다. 그건 작은 일이지만, 내 안에 큰 움직임을 만든다.
다른 언어 속 내 이름은, 기억으로 남는 인사였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도, 낯선 거리에서 들었던 내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를 ‘기억하려 했던’ 사람의 태도, 내 이름을 끝까지 불러보려 한 낯선 입술의 움직임,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눈 맞춤까지. 그 모든 것이 이름이라는 하나의 호명 안에 담겨 있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결국 타인을 인정한다는 행위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는, 언어가 다를수록 더 뚜렷해진다. 언어의 경계를 넘어 내 이름을 부르려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단순히 나를 ‘지칭’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들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진심이었고, 존중이었다. 돌아온 후에도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린다. 아무리 화려한 관광지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그런 짧고 사적인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모두 낯선 나라의 ‘손님’이 아니라, 진짜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된 건, 어쩌면 그런 작은 순간들 덕분이었다. 다른 언어 속에서 내 이름을 들은 건 단순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았다는, 작지만 확실한 흔적이었다. 이제 내 이름은 한국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억양, 다른 리듬, 다른 문화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살아간다. 이름은 그렇게, 세계를 건너는 인사였고, 나를 남기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