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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서 마주한 진짜 침묵. 낯선 나라의 거리에서, 나는 말 없는 시간을 통해 진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1. 언어가 닿지 않는 순간, 침묵은 시작되었다
공항을 나서던 순간부터 느꼈다. 익숙한 간판이 없었고, 내가 아는 언어는 이 도시의 일상에 녹아 있지 않았다. 택시 기사와 눈으로 대화했고, 호텔 직원의 설명도 알아듣지 못했다. 스마트폰 번역 앱이 있었지만, 기계적인 문장은 정서를 전달하지 못했다. 나는 마치 무성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움직였다. 말이 막히니, 세상도 막혀버린 것 같았다. 처음 며칠은 외로움이 나를 꽉 붙들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단지 소통의 문제를 넘어서 내 존재감마저 지우는 듯한 기분을 안겼다. 하지만 그런 고립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낯선 나라의 침묵은 점점 다른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았지만, 말 걸진 않았다. 말하지 않는 하루가 쌓이면서, 내 안의 언어는 조용히 잠잠해졌다. 생각은 여전히 떠올랐지만, 그것을 말로 옮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침묵은 점차 억제된 상태가 아닌, 하나의 능동적인 태도로 변모했다.
도시의 풍경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말이 없으니 더 자주 바라보게 되었고, 듣지 않으니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도,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도 나는 ‘말’보다 더 많은 걸 보고 배우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눈빛은 정직했다. 아이의 웃음, 상인의 손짓, 조용히 차를 마시는 노부부의 모습 속에서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 말 없는 교감, 소리 없는 공감, 언어 너머의 인간적 연결. 침묵은 나를 분리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과 더 조용히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2. 소리 없는 도시에서 만난 나의 목소리
그 나라에 머문 지 일주일이 넘자, 말하지 않는 하루가 더는 낯설지 않았다. 아침이면 조용히 거리로 나서, 소리 없는 산책을 즐겼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서도, 외곽의 작은 골목에서도 나는 침묵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비워지는 감각이 아니라, 채워지는 감정으로 다가왔다. 말이 없으니 오히려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무엇이 나를 숨 막히게 했는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살아왔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웃음을 나누고, 때로는 의미 없이 채워 넣은 말들로 내 하루를 구성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는 처음엔 불편했지만, 이내 자유로워졌다. 말이 줄어들수록 생각은 깊어졌고, 감정은 더 정직해졌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특히, 도서관처럼 조용한 공공 공간에서 느낀 감정은 특별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누군가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 창밖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까지—이 모든 것이 언어 없이도 강력한 울림이 되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가슴속 깊은 곳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전자는 선택이며, 그 침묵은 때때로 언어보다 더 풍부하고 넓은 세계를 품고 있었다.
낯선 도시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가장 깊게 마주할 수 있었다. 소리 없는 외로움 속에서, 오히려 나의 내면은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본질적인 나의 목소리였다.
3. 떠나기 전, 침묵이 가르쳐준 것들
떠나는 날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묘해졌다. 다시 익숙한 언어의 세계로 돌아갈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이 고요한 감정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말 없는 삶은 잠시였지만, 그 안에서 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말이 없을 때, 사람은 더 진실해진다. 내 감정은 포장되지 않았고, 표현이 정제되지 않아도 그대로 존중받았다.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도 충분히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현지의 작은 사찰에 들렀던 기억이 있다. 종교적 의도가 아닌, 그저 고요함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벗겨진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말없이 향을 피우고 앉아 있었다. 나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어떤 기도를 한 것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침묵 속에서 시간이 머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몇 분이 내가 여행 전체를 통해 얻은 가장 깊은 경험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여전히 조용했다. 기내방송도, 승무원의 인사도 모두 들렸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낯선 나라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침묵은 그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이 열리는 방식이고, 존재를 정리하는 시간이며,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혼자 카페에 앉아, 그 나라에서처럼 조용히 머물러보곤 한다. 침묵은 이제 내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머무는 감정의 집이 되었다. 낯선 나라에서 경험한 완전한 침묵은, 나를 다시 나에게 돌려주었고, 말보다 진한 울림으로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