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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짧은 순간, 그 침묵 속엔 낯섦과 친밀함, 두려움과 위로가 동시에 스며 있었다. 그 눈빛은 말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1. 우연과 마주침: 골목의 시선이 내게 말을 걸다
그날은 별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바람은 조금 서늘했고,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걷던 길 모퉁이에서 느릿한 움직임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시멘트 담장 위, 햇빛과 그늘의 경계에 한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이 도시에서 고양이를 보는 건 낯설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고양이의 눈은 놀라울 만큼 깊고 조용했다. 금색과 녹색이 섞인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시선에 이끌려 멈춰 있었다. 그 눈빛은 경계와 호기심, 그리고 묘하게도 ‘인정’ 같은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사람의 눈빛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결코 가볍지 않은 정적이었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고양이와 나 사이의 공간만이 유일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소통도 없었지만, 그 시선 안에는 많은 말이 숨어 있었다. “너는 누구니?” 혹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같은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고, “괜찮아, 그냥 같이 있어도 돼” 같은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감정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저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묘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무언가에게 관찰당한다는 느낌이 아닌,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 나라는 존재를 어떤 판단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시선은 참 따뜻하고도 서늘했다.
고양이와의 눈 맞춤은 단지 몇 초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순간이 마음속 깊은 침묵을 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말로 확인하려 하지만, 그 순간엔 말이 필요 없었다. 단지 눈빛만으로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잊히지 않을 인상을 남긴다는 것. 고양이는 곧 고개를 돌리고, 담장 너머로 사라졌지만, 그 시선은 한참 동안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2. 고양이의 눈빛이 건넨 침묵의 위로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내 마음속의 소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바쁘게 지나온 일상, 복잡한 생각, 억지로 꾹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그 조용한 눈빛 앞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고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준 듯했다.
고양이의 눈은 흔히 ‘무심하다’는 표현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눈빛에서 오히려 깊은 집중과 무언의 공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인간이 건네는 관심과는 다르게, 조건 없는 관찰, 판단 없는 인식이었다. 그 날의 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 눈빛은 그런 마음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감싸주는 듯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관계의 긴장이 있다. 말로 상처를 주고, 표정으로 오해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익숙해진다. 하지만 고양이의 눈빛은 그런 불필요한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판단 없이, 이름 없이, 오직 존재만으로 마주하는 시선. 그래서일까. 그 눈빛은 마치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묘한 위로를 건넸다.
고양이는 다시 나를 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충분히 바라보았고, 관심을 주었고, 이제는 자신의 시간을 이어간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 고양이의 눈동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때로 위로는 말이 아니라, 그런 시선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양이의 눈은 어쩌면 내가 내 마음을 처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창이었다. 거울을 들이민 것이 아니라, 창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 눈빛 덕분에 나는 내 감정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있었고, 그날 이후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조금 더 눈을 맞추는 데 익숙해졌다. 말보다 시선이 먼저인 위로, 그것이 고양이와의 마주침이 내게 남긴 조용한 선물이었다.
3. 눈빛이 남긴 흔적, 다시 길 위에서
고양이는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뭔가 달라져 있었다. 골목의 풍경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 눈빛을 지나치고 나니, 나는 더 많은 것을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담벼락에 떨어진 낙엽, 작은 물고임 하나에도 내 시선이 머물기 시작했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뒤흔든 조용한 전환점이었다. 특별한 대화도, 만남도 없었지만, 나는 그 눈빛 하나로 하루의 감정이 정리되고, 마음속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나는 고양이를 마주치는 일이 늘 기다려지게 되었다.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그들의 시선을 다시 찾으려 했고, 그러다 또 한 마리의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 그 감정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물론 그 눈빛은 늘 다르다. 경계심 가득한 시선일 때도 있고, 졸린 눈으로 흘끗 던져지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 시선에는 늘 ‘스스로의 리듬을 잃지 않는 존재의 단단함’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 단단함은 어느새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예전의 나는 자주 흔들렸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내 실수 하나에, 지나가는 시선 하나에도 중심을 잃곤 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눈을 통해 나는 ‘흔들리지 않고 바라보는 것’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심함이 아니라 중심을 지키는 법이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 고양이를 만나면 나는 먼저 멈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다시 나를 마주한다. 그 짧은 시간 속에 쌓이는 감정은 여전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 눈빛이 내 삶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말없이 말을 건넨 고양이의 시선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눈빛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길 위를 걷는다.